지난해 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풋풋한 청춘 서사로 화제를 모았다. 특히 IMF 외환 위기와 세기말을 경험한 이들은 주인공 나희도(김태리 분)와 백이진(남주혁 분)에 뜨겁게 공감하고 몰입했다. 해외 OTT(영화, 드라마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제공하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덕분에 주요 촬영지 전주가 주목받아, 서학동예술마을과 한벽굴(한벽터널)이 새로운 여행지로 떠올랐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전주한옥마을과 마주 보는 서학동은 과거 ‘선생촌’으로 불렸다. 교사와 학생들이 많이 거주해, 소박하고 인정이 넘치는 동네였다. 그러나 이웃한 전주한옥마을에 비해 발전은 더디기만 했다. 구도심이 쇠퇴하며 상권이 무너지고 빈집이 늘었다. 그러던 2010년, 예술인 부부가 터를 잡으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음악과 미술, 문학,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모여 일종의 예술촌이 형성된 것.
이렇게 탄생한 서학동예술마을 한편에 음악 스튜디오 소리방앗간이 있다. 드라마에서 명진책대여점으로 등장한 이곳은 만화 〈풀하우스〉의 열혈 독자 희도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책방이자, 이진이 아르바이트한 곳이다. 남녀 주인공의 인연이 시작된 공간이다 보니 방영 초기부터 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현재는 내부 세트장을 철거하고 외부에 작은 나무 간판만 남았다. 그 옆으로 바느질 공방과 수제 비누 공방이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더한다.
건너편 골목 역시 드라마 배경으로 활용됐다. 찢어진 만화책을 몰래 반납하려다 들킨 희도가 울면서 뛰어간 길이다. 입구엔 담쟁이덩굴이 멋스러운 27레코드가 드라마 속 모습 그대로 있다. 본래 설치미술가 한숙의 갤러리 겸 작업실 초록장화가 있던 자리다. 마을 부촌장을 맡기도 한 그녀는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할매공방을 운영하고, 주민과 예술가가 어우러진 전시를 여러 차례 선보였다. 따스한 봄이 오면 레코드 숍은 마을 사랑방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서학동예술마을은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재미술관이 대표적이다. 화가 이희춘의 작업실이자 갤러리로, 뒷마당에 게스트하우스 몽유화원을 운영한다. 전주천에 얽힌 유년 시절의 추억을 따라 서학동에 자리 잡았다는 그는 한국 고유의 자개 무늬를 모티프로 한 ‘몽유화원도’ 시리즈로 이름을 알렸다. 동양적인 화풍으로 미국과 중국 등에서 각광 받는다.
서학동사진미술관과 구석집도 매력적이다. 좁은 골목 끝자락 오래된 한옥을 리모델링한 서학동사진미술관은 사진작가 김지연이 운영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주로 선보인 서학동사진관으로 시작해, 지난가을 서학동사진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역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을 소개한다. 구석집은 이름처럼 한갓진 골목 구석에 있다. 앞서 소개한 한숙 작가가 운영하는데, 주로 동네 아이들의 그림이나 할머니의 조각보처럼 소소하면서도 따스한 감동이 있는 작품이 공간을 채운다.
화가 이적요의 작업실 적요숨쉬다는 카페로도 활용한다. 과거 이 건물은 막걸리를 파는 곳이었는데, 이제 작가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쉼터가 됐다. 작가가 내리는 향기로운 커피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이 여행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운이 좋으면 커튼 너머에 숨겨진 아틀리에도 엿볼 수 있다. 바느질과 텍스트를 활용한 화풍과 강렬한 색감이 인상적인 작품이 여기서 완성된다.
서학예술마을도서관도 놓치면 안 될 볼거리다. 아름다운 정원과 붉은 벽돌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 이곳은 다양한 예술 분야 도서가 있다. 서학동예술마을 작가의 저서나 작품집도 있어 더욱 뜻깊다. 오른쪽 담쟁이동에서는 예술가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나 전시를 진행해 지역의 정체성을 오롯이 담아낸다. 마을 구석구석에 크고 작은 공방이 있어 걷는 재미를 더한다. 일부 공방에선 패브릭 소품이나 액세서리를 만드는 체험이 가능하다.
서학동예술마을에서 전주천을 따라 15분쯤 걸어가면 한벽굴을 만난다. 드라마에서 희도가 상처 받은 이진을 위로한 이곳은 싱그러운 청춘을 담아내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한동안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서야 할 만큼 붐볐지만, 겨울에 접어들며 다소 한산해진 모습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바람쐬는길은 이진이 신문 배달을 하던 배경으로 나왔다. 통행량이 적어도 찻길이라 사진 촬영 시 주의가 필요하다.
한벽굴은 일제강점기 전라선을 건설하기 위해 만들었다. 왼쪽 언덕에 조선 시대 누각 한벽당(전북유형문화재)이 있는데, 풍광이 빼어나 전주팔경으로 꼽혔다. 이처럼 아름다운 한벽당의 정기를 끊고 기찻길을 냈으니 역사적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발아래 전주천이 굽이지며 고즈넉한 풍경을 빚어낸다. 그 옆으로는 달맞이를 즐기는 요월대가 운치를 더한다.
드라마 팬이라면 희도의 집과 아현슈퍼도 둘러보길 추천한다. 전주한옥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희도의 집은 현재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한다. 내부 촬영은 세트장에서 했지만 하얀 대문과 남녀 주인공을 비추던 가로등, 설렘과 망설임이 교차하던 계단 등 외관은 드라마에서 본 대로다. 전주 남고산성(사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아현슈퍼는 세트장이다. 촬영이 끝나고 철거한 것을 전주시에서 다시 꾸몄다. 주인공들이 앉은 평상도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희도는 이진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심을 일기장에 꾹꾹 눌러쓴다. 첫사랑 앞에서 모두가 시인이던 그 시절을 떠올리기 좋은 공간이 있다. 서학동 뒤쪽에 들어앉은 학산숲속시집도서관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시집 특화 도서관으로, 국내외 다양한 시집이 한자리에 있다. 시원한 통창 너머로 보이는 울창한 숲이 그림 같다. 겨울에는 설경이 분주한 일상을 잊게 만든다. 마음에 드는 시를 필사하는 체험도 진행한다.
전주한옥마을을 새롭게 즐기는 방법, 경기전 건너편 2층에 있는 모주체험여에서 전주를 대표하는 모주를 만들어보자.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막걸리에 생강과 대추, 계피 등 각종 한약재를 넣고 하루 동안 끓였다는 모주는 지역에서 해장술로 통한다. 체험은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만들기 쉽고 한약재도 직접 골라 믿을 만하다. 모주를 완성하면 경기전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도 할 수 있다.
전주의 예술적 감성을 느껴보고 싶다면 팔복예술공장에 들르자. 카세트테이프 공장을 리모델링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국내외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스로 활용하며 실험적인 전시를 선보인다. 이곳에서 일하던 여공을 소재로 한 사진이나 설치 작품이 흥미롭다. 서학동예술마을과 협업한 예술놀이터가 눈에 띄는데, 어린이를 위한 예술 놀이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이팝나무그림책도서관이 있어 가족 단위로 찾는 관람객이 많다.
여행 정보
글·사진 : 권다현(여행 작가)
※ 위 정보는 2023년 1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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